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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사-인물사전

옥타비아누스, 혼란의 로마를 제국으로 바꾸다

— 줄리우스 카이사르의 양자에서 초대 황제로 —

1. “나는 줄리우스 카이사르의 후계자다”

기원전 63년, 가이우스 옥타비우스 투리누스(Gaius Octavius Thurinus)는 평범한 기사 계급 가문에서 태어났습니다. 그에겐 권력자 가문의 피가 흐르지 않았지만, 운명은 아주 이례적인 방식으로 그의 인생을 바꿔놓습니다.

기원전 44년, 줄리우스 카이사르가 브루투스와 카시우스 등에 의해 암살당했을 때, 공개된 유언장에서 옥타비아누스는 카이사르의 양자이자 유산의 법적 상속자로 지명되어 있었습니다. 이때 그의 나이는 겨우 19세.

카이사르의 이름을 계승한 그는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 옥타비아누스'로 개명하며, 로마의 중심 무대에 올라섭니다.
하지만 그의 앞길은 순탄치 않았습니다 — 로마는 이미 수많은 장군과 귀족들 간의 권력다툼으로 혼란에 빠져 있었죠.

2. 삼두정치, 권력을 위한 불편한 동맹

옥타비아누스는 카이사르 암살의 복수를 명분으로 마르쿠스 안토니우스, 마르쿠스 레피두스와 함께 `제2차 삼두정치(Triumvirate)`를 구성합니다.
그들은 브루투스와 카시우스를 필리피 전투에서 물리치고, 카이사르의 원수를 갚았죠.

하지만 이 동맹은 오래가지 못합니다.
레피두스는 곧 정치적 영향력을 상실했고, 옥타비아누스와 안토니우스는 로마의 패권을 두고 냉랭한 갈등을 이어갔습니다.

특히 안토니우스가 이집트에서 클레오파트라와 동맹하고, 그들의 자녀들에게 동방의 영토를 나눠주자, 옥타비아누스는 로마 시민들에게 “로마의 배신자”로 그를 몰아세우며 정치적 우위를 점합니다.

3. 선전의 귀재, 옥타비아누스

옥타비아누스는 싸우기 전에 이기는 법을 아는 인물이었습니다.
그는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의 관계를 로마 시민들에게 “국외 여왕에게 조종당하는 로마인의 비극”으로 선전했으며,
자신은 전통과 조국, 로마 시민의 권리를 수호하는 자로 이미지를 구축했습니다.

📌 당시 안토니우스의 전 부인이자 옥타비아누스의 누이였던 ‘옥타비아’를 이용한 감성전은, 로마 여론을 완전히 뒤바꿔 놓았습니다.

그의 선전은 단순한 거짓이 아닌, 사실과 감정을 전략적으로 조합한 정치 기술이었으며, 이 능력이야말로 옥타비아누스를 단순한 정치인이 아닌 제국의 건축가로 만든 핵심 무기였습니다.

4. 악티움 해전, 제국의 서막을 열다

기원전 31년, 그리스 악티움 앞바다에서 옥타비아누스와 안토니우스·클레오파트라 연합군의 운명을 가르는 전투가 벌어집니다.

전투는 시작 전부터 옥타비아누스의 승리로 기울어져 있었습니다.

  • 군자금, 선전, 내분 조성,
  • 그리고 천재 전략가 아그리파의 함대 지휘까지.
    결국,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는 이집트로 도망쳤고, 그 후 자살로 생을 마감합니다.

옥타비아누스는 이듬해 이집트를 로마에 병합하며, 로마 역사상 유례없는 개인 권력을 손에 넣게 됩니다.

5. 로마 최초의 황제, 하지만 '황제'라 부르지 않았다

기원전 27년, 옥타비아누스는 “나는 모든 권력을 원로원에 돌려준다”고 선언합니다.
이 말은 겉보기엔 겸손의 미덕 같지만, 실제로는 권력 장악을 공식화하는 선언이었습니다.

원로원은 그에게 '아우구스투스(Augustus)', 즉 ‘존엄한 자’라는 칭호를 수여했고,
그는 프린켑스(princeps) — “로마 시민 중 제1자”라는 지위를 받아 사실상 황제로 통치하기 시작합니다.

📌 그는 *왕(King)*이라 불리는 걸 철저히 경계했지만, 모든 군사권, 행정권, 종교권을 독점한 실질적인 황제였습니다.

6. 피와 칼이 아닌, 질서와 안정의 로마

아우구스투스의 치세는 로마 제정의 시작이자 황금기 '팍스 로마나(Pax Romana)'의 서막이었습니다.
그는 도로, 수도, 행정, 군제 개혁을 통해 로마 전역에 질서를 부여했고, 경제와 무역이 번성하면서 평화의 이미지를 구축했습니다.

그의 정치 방식은 유연하고 실용적이었으며, 무엇보다도 “시민들이 원한 것”을 제공하는 방식이었습니다.
심지어 반대파를 물리칠 때조차 그는 무력보다는 제도와 명분을 내세웠습니다.

옥타비아느스, 혼란의 로마를 제국으로 바꾸다

7. 아우구스투스가 남긴 유산

그는 기원후 14년까지 장장 40여 년간 로마를 통치한 후 자연사하였습니다.
로마 시민들은 그를 신격화하였고, 이후 황제들은 ‘카이사르’와 ‘아우구스투스’라는 이름을 칭호처럼 사용하게 됩니다.

그가 남긴 유산은 단순한 정치체제의 변화가 아니라, 전 유럽 세계 질서의 기틀이었습니다.
오늘날까지도 ‘August’라는 달의 이름은 그를 기리는 이름이며, 그의 통치 철학은 수많은 제국의 모델이 되었습니다.

8. 왜 아우구스투스는 시대의 승자가 되었는가?

안토니우스, 클레오파트라, 브루투스, 카이사르…
수많은 이들이 권력과 이상을 놓고 투쟁했던 시대, 결국 승자는 힘과 이미지, 전략과 인내를 모두 갖춘 한 남자, 아우구스투스였습니다.

그는 로마를 피의 내전으로부터 구해냈고, 질서로 이끌었으며,
“나는 벽돌의 로마를 대리석의 로마로 만들었다”는 말처럼, 문명과 문화의 제국을 남긴 창시자로 기억됩니다.